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58)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한국전쟁으로 국내의 신문 발행이 중단됐고, 인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 이전에 이미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인천신문은 한국전쟁으로 복간의 기회를 찾지 못하고 영원히 폐간됐다. 대중일보도 발행이 중단됐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천의 언론 활동도 모두 중단됐다.

전쟁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혼란이 지속되며 대부분의 신문 발행이 중단된 상황이지만, 9월 15일에 맥아더가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대중일보 창간 주역이던 송수안은 미군정으로부터 신문 발행 허가를 얻어내 9월 19일에 인천신보를 창간했다.

인천신보는 대중일보의 시설과 인원을 그대로 계승해 발행한 신문이기에 비록 제호를 바꾸고 지령도 새로 시작했으나, 사실상 대중일보를 계승한 신문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중일보가 발행을 중단하기 전인 1950년 6월 16일자 신문 갈무리.(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중일보가 발행을 중단하기 전인 1950년 6월 16일자 신문 갈무리.(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속간된 신문은 전쟁 통에 정보에 목말라하던 인천 시민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인천신보는 전쟁 상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언론으로서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전세가 다시 역전되어 국군이 후퇴하게 되자 인천신보는 1월 4일자 신문을 인천에서 마지막으로 발행하고 부산으로 철수했다.

피난 중에도 인천신보는 부산에서 속간을 하지만, 열악한 현지 사정으로 제대로 신문을 발행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 시기에 인천신보 관련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천신보는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서 신문 발행을 재개했다.

한국전쟁 와중에 인천은 타 지방의 언론이 임시로 신문을 발행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정부가 부산을 임시 수도로 삼고 있었고, 같이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신문사들이 전시판을 어렵게 발행했는데, 전황이 개선되자 다시 서울로 올라올 시도를 하는 신문이 늘어났다.

그러나 중부 지방에서 공방이 계속돼 어수선한 상황이 지속되자 일부 신문은 인천에서 전시판을 발행했다.

동아일보는 1951년 5월 1일 인천에서 전시판을 발행했고, 하반기에는 대한신문도 인천에서 전시판을 발행했다. 이들 신문은 서울이 수복되고 다시 서울로 옮겨갔으나 인천에서 신문을 발행하는 동안 지역 문인들의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8월 1일에는 인천일보가 창간했다.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발행했는데, 발행인에 김병윤, 편집인 맹헌, 인쇄인 채호로 발행 허가를 받고 신포동 11번지에서 창간했다.

1953년 창간 1주년을 계기로 자체 인쇄시설을 갖추고 지면을 타블로이드에서 표준 판형으로 늘려서 의욕적으로 신문을 발행했다.

인천일보는 전쟁 중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던 김병윤이 1956년 복귀하면서 그동안 신문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던 맹헌과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며 소송이 이어진다.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양측이 인천일보 제호로 서로 다른 내용의 신문을 발행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재판 결과 김병윤이 승소했고, 인천시 관동 2가의 새로운 사옥으로 신문사를 이전하며 제호를 경인일보로 변경해 신문을 발행했다. 주간에 김길봉, 편집국장 김윤환, 총무국장에 이옥산이 참여했다.

이후 1957년 6월에 김길봉 주간이 부사장 겸 주필이 됐고 같은 해 10월 최성연이 편집국장이 됐다. 그 후 채호가 사장을 맡기도 했고,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이옥산이 사장이 됐으나 시설기준 미달로 창간 9년 만에 자진 폐간했다.

‘인천공보’는 기관지 성격의 주간지로, 1953년 1월 10일 당시 인천시장이던 표양문을 발행인으로, 편집인에 최병환을 임명하고 출범했다. 인천공보는 인천시가 시민들에게 시정을 홍보하는 목적으로 발행한 기관지였지만 일반 기사를 제공하는 보도기능도 있었다.

1954년 11월 27일 부터는 판형을 신문판형으로 바꿨으며 시와 단편소설 등 문예작품과 상업광고도 게재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에 제호가 ‘재건인천’으로 변경되고 완전한 기관지 성격의 신문으로 회귀했다.

기관지 성격의 주간지 이외에 순수 민간 주간지로 발행된 ‘주간인천’은 1954년 4월 12일 발행인 임영균, 편집인 김응태 명의로 창간했다.

인천에서 발행된 유일한 민간 주간지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창간 당시 주간인천의 주필은 고일이었고 주간에는 권성오, 정치부장 김상봉, 문화부장은 김양수였다.

주간인천은 지령 305호를 끝으로 창간 6년 만에 종간되었다. 주간인천의 운영진들은 종간 이후 일간지 ‘인천신문’을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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