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대 교수의 전통문화 기웃거리기] ①

인천투데이=서영대 교수|옛날이야기를 공부하다 보면 세계가 생각보다 좁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시간적으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지역이나 민족 사이에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할머니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태조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젊은 시절 아버지를 찾으러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위기에 처한 서해 용왕 가족을 구한다. 그 보상으로 작제건은 서해 용왕의 딸 자민의(煮旻義)와 혼인하고, 중국으로 가는 대신 고향인 송악(개성)으로 돌아와 가정을 꾸린다.

용녀 자민의는 침실의 창밖에 우물을 파고 그 우물을 통해 친정인 서해 용궁을 드나들었다. 일찍이 용녀는 작제건과 약속하기를, 자신이 친정을 가기 위해 우물 안으로 들어가면 절대 드려다 보지 말라고. 만약 약속을 어기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아뒀다.

하지만 보지 못하게 하면 더욱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 결국 작제건도 그간 잘 눌러왔던 궁금증이 폭발해, 어느 날 용녀가 시녀를 데리고 들어간 우물 속을 드려다 보고 말았다. 용녀는 시녀와 같이 황룡으로 변해 오색구름을 일으키며 우물 깊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작제건은 속으로 몹시 놀랐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시치미를 떼고 용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용녀는 작제건이 한 일을 벌써 다 알고 있었기에, 돌아오자마자 “부부 간의 도리는 무엇보다 신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데 이제 이미 약속을 어겼으니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시녀와 함께 다시 용으로 변해 우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용녀는 떠났지만 그 사이에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큰 아들이 용건이고, 태조 왕건은 바로 이 용건의 큰 아들이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역사서 ‘고려사’의 첫 부분이다. 이 부분을 ‘고려세계’라고 하는데, 태조 왕건의 조상들을 언급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태조의 조상들은 예사 사람들이 아니다. 산신 할머니도 있고 당나라 황제도 있지만, 이처럼 용왕과 용녀도 있다.

특히 고려의 왕실이 용의 자손이란 관념은 고려시대 내내 강조됐다. 고려 제2대 혜종은 용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부자리가 축축해야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용의 자손은 12대로 끝난다”는 말은 곧 고려왕조가 망한다는 예언이었다. 또 이성계 일파가 위화도 회군 후,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의 자손이 아니라 신돈의 자손이라고 트집 잡아 폐위시키고 끝내 목숨을 빼앗았는데, 처형을 당하면서 우왕은 겨드랑이에 달린 용 비늘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용의 자손이란 이야기들은 황당한 것 같지만 여기에는 목적이 있다. 고려의 왕은 신령의 후손이기 때문에 세상을 다스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왕권을 신성화해 지배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많은 옛이야기들이 그러하듯이, 작제건과 용녀 설화에도 다른 버전들이 있다. 개중에는 아주 비슷한 것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거타지 설화가 그러하다. 거타지 설화는 ‘삼국유사’로 전해지는데, 주인공 이름이 거타지라는 것 이외에는 아주 흡사하다.

거타지 설화에 설화의 무대가 서해의 골대도라 밝힌 점도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골대도는 백령도의 옛 이름이며, 그 연못은 연화 1리에 있었다고 한다.

연못은 약 100년 전에 농지로 개간됐지만, 지금도 땅을 갈다보면 연꽃 씨가 나온다는 말을 필자가 백령도를 조사하러 다니면서 주민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설화 속의 용녀는 우리 인천광역시와도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

스타벅스 이미지.(출처 픽사베이)
스타벅스 이미지.(출처 픽사베이)

아주 비슷한 이야기는 인천과 멀리 떨어진 유럽에도 있다. 멜루지네라는 물의 요정 이야기이다. 프랑스 쁘와투 지방의 백작 레이몽당은 사냥을 나갔다가 연못가에서 멜루지네를 만난다.

레이몽당은 멜루지네가 매주 토요일 목욕을 할 때는 절대 엿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결혼을 했다. 둘의 사랑은 깊었고 레이몽당도 약속을 잘 지켰다.

그러나 주위에는 둘의 사이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멜루지네가 토요일마다 레이몽당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다른 남자를 만나기 위한 핑계라고 모함했다.

결국 레이몽당도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멜루지네의 욕실을 훔쳐보고 말았다. 그녀의 상반신은 변함없이 아름다웠으나, 하반신은 꼬리가 달린 뱀이 아닌가. 멜루지네가 이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멜루지네의 어머니는 남편으로부터 배신을 당했고, 멜루지네는 이런 아버지에게 복수를 했다. 어머니를 위한 복수였지만, 아직 사랑이 식지 않은 어머니는 오히려 멜루지네에게 저주를 내렸다.

매주 토요일마다 하반신이 뱀으로 변할 것이며, 결혼도 절대 토요일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하반신은 영원히 뱀인 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어머니의 저주와 레이몽당의 배신 때문에 멜루지네는 레이몽당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10명이나 되는 자식을 남겨둔 채 말이다.

이 이야기는 1394년 쟝 달라스의 ‘고귀한 뤼지앙 가문의 이야기’로 처음 알려진 이래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유럽 예술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괴테의 멜루지네 동화나 멘델스존의 ‘아름다운 멜루지네 서곡’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용녀 설화와 멜루지네 설화는 비슷한 점이 참 많다. 두 여인 모두 물의 여신으로 물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엿보지 않기 약속을 깨었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또 왕조와 가문이란 차이는 있지만, 시조 전승이란 점에서도 유사하다.

거리를 오가면서 스타벅스 커피의 로고를 보고 있노라면, 용녀나 멜루지네는 옛 이야기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스타벅스 커피의 로고가 인어 아가씨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 로고는 1971년 창립자들이 회사가 자리한 시애틀이 해안도시라는 점을 부각시킬 목적으로 수많은 해양서적을 뒤적이다가 찾은 것이 16세기 무렵 노르웨이에서 제작된, 꼬리가 둘로 갈라진 인어 판화였다.

이후 이 로고는 디자인이나 색깔은 변했지만, 또 경영자가 바뀌기도 했지만, 모티프 자체는 변함없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어에 대한 관념은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인어도 매우 다양하다. 그렇다면 스타벅스의 로고는 인어 중에서도 어떤 인어일까. 자료를 검색하면 두 가지 설명이 나온다.

하나는 세이렌이란 설명이다. 세이렌은 섬에 살면서 지나가는 선원들을 노래로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 신화의 요괴이다. 세이렌은 그리스 당시에는 새 모양의 여성이라 했으나, 중세로 오면서 물고기 모습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이 설에서는 로고 채택의 이유로 세이렌처럼 손님들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멜루지네라는 설명이다. 서양에서는 거장들의 작품에 등장할 정도로 멜루지네는 유명하기 때문에 로고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타벅스의 로고를 멜루지네의 부활로 간주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멜루지네가 생소한 탓인지 세이렌 설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반면 서양권에서는 멜루지네 설이 더 우세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창업자들의 생각이지만, 이를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단정할 수는 없다. 어쩌면 창업자들은 인어 판화가 마음에 들어 로고로 채택한 데 불과하지만, 스타벅스가 유명해지자 사람들이 여기에 의미 부여를 하면서 이런저런 설명이 나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멜루지네 설이 옳다면, 또 멜루지네가 태조 왕건의 할머니 용녀와 맥이 닿는다면, 그녀들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작으나마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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